Home - 뿌리찾기 - 좌정승공파종친회 - 좌정승공파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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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1392년 입도조 척제공(惕齊公) 휘(諱) 만희(萬希) 조(祖)는 이성계가 조선조를 건국한 후 중신으로 기용하겠으니 출사하라고 수차례에 걸쳐 간곡히 불렀으나 고려의 충신으로서 두 임금을 섬김이 부끄럽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키다가 태조 2년 1393년에 제주로 유배(流配)되어 애월 곽지악(郭之岳) 기슭에 적거(謫居) 하시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시름을 달래며 이웃들에게 충효의 길과 사람의 정도(正道)를 가르치는 것을 낙(樂)으로 삼아 11년 동안 머무시다가 91세에 이르러 비로소 귀향길에 오른다.
공은 손자 예(禮)와 증손 봉(奉)과 검(儉) 형제를 제주에 남겨 두셨는데 이때부터 제주를 세거지(世居地)로 하는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가 뿌리를 박게 된 것이다.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봉(奉)은 정광지손(靖匡之孫)이라며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명을 하였으나 불복지손(不伏之孫)이 어찌 입궐(入闕)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관직을 사양하였다.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입도6세 계찬(継瓚)은 어모장군 사복시정(禦侮將軍 司僕寺正)에 올랐고, 입도6세 후찬(厚瓚)은 천호직장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千戶直長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의 벼슬에 오른 것이 가문을 다시 관직의 길로 이끈 계기가 되었으며, 김해김씨 좌정승공파가 발돋움하는 중흥의 바탕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입도 6세 계찬(継瓚)의 아들인 입도 7세 용지(用砥)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곧 방(邦)자 돌림으로 그 유명한 8방(八邦)이다. 인(仁), 충(忠), 의(義), 필(弼), 예(禮), 안(安), 신(信), 지(智)의 글자를 차례로 이름에 넣어 지었으며, 이때부터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2020년 현재 후손들은 대략 7∼8만 명이 제주도 내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